#23. 이 꿈에서만 겁쟁이
[서막: 나는 오늘 밤도 죽었다]수심 20미터가 넘는 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발버둥쳤지만 몸은 계속 아래로 끌려갔다.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숨을 참은 채 허우적대다 그렇게, 물속에서 죽었다.눈을 뜨면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이번엔 미국 어딘가의 불법 기지. 환풍구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이유를 알 수 없는 살기를 감지해 몸을 피했고, 몇 초 뒤 건물 대부분이 폭파되었다. 연기가 걷히는 순간, 낯선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 갈 길을 갔다.모래폭풍이 하늘을 삼킨 서부시대의 기차역. 동생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폭풍이 둘을 갈라놓았다. 세상이 온통 황토빛이었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혼란 속에서 장면이 또 전환되었다. 이번엔 어린 시절 살던 좁은 집. 누군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커튼 뒤뿐이었다. 발소리가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지다가 칼이 꽂혔다. 심장이 관통되는 고통. 몸이 분해되는 느낌.그리고 장면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익숙한 침실이었다. 익숙한 상대의 그녀, 그보다 그 뜨겁고 습한 온도가 먼저였다. 서로의 몸이 맞닿는 감각, 가빠지는 호흡,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열기. 누군가와 뒤엉킨 열기 속에서 몸은 서로의 그것을 탐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깨어나기 싫었다.마지막은 아파트 창문 너머로 외계 생명체의 눈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키면 끝이라는 걸 알았다. 숨을 참으며 기다렸다. 사라졌다 싶어 나왔을 때, 그들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그 다음의 기억은 없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물속에서 실제로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자다가 익사할 뻔 했다. 칼에 찔린 꿈에서 깨면 온몸이 아팠다. 누군가와 뒤엉켰던 꿈에서 깨어나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꿈이었다. 그런데 몸은 그것을 몰랐다.꿈은 전적으로 내가 만든 세계다. 그 안의 폭발도, 죽음도, 온기도, 공포도 전부 내 뇌가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런데 그 상상 안에서, 몸은 진짜로 반응했다. 심장이 뛰었고, 근육이 긴장했고, 피부가 달아올랐다.그렇다면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 "뇌는 어떻게 '진짜'와 '꿈'을 구분하는가?"아니, 더 정확하게 묻는다면, "뇌는 정말로 그 둘을 구분하고 있는가?" [뇌라는 감독: 세계를 찍어내는 촬영 현장]사과는 빨갛다.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빨강은 어디에 존재하는건가?사과 표면에 존재하는 것은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하는 분자 구조뿐이다. 빨강이라는 색은 그 파장이 눈의 망막을 통과해 시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한 뒤, 뇌가 그것을 '빨강'으로 번역하는 순간 비로소 탄생한다. 사과가 빨간 것이 아니라, 뇌가 그것을 빨갛게 만드는 것이다. 색약인 사람에게 그 사과가 다른 색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과가 달라진 게 아니다. 번역기가 다를 뿐이다.소리도 마찬가지다. 우주에는 소리가 없다고들 한다. 정확히는 소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기 입자의 진동이 있을 뿐이다. 그 진동이 고막을 울리고 청각 신경을 타고 뇌에 전달될 때, 뇌가 그것을 '소리'로 변환한다. 소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뇌가 없으면 이 세계는 침묵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매운맛도 다르지 않다. 일본인이 한국의 컵라면 후추 향에 입술을 오므릴 때, 불닭볶음면을 아무렇지 않게 비우는 사람의 뇌와 같은 자극을 받고 있다. 차이는 혀가 아니라 그 신호를 해석하는 뇌의 기준값에 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철저하게 뇌가 편집한 버전이다. 다시 꿈으로 돌아온다.꿈 속에서 물에 빠졌을 때, 폐는 실제로 수축했다. 칼에 찔렸을 때 신경은 실제로 고통 신호를 발화했다. 누군가의 온기를 느꼈을 때 피부의 감각 수용체는 실제로 반응했다. 뇌는 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뇌의 입장에서 그것은 처리해야 할 하나의 감각 데이터였을 뿐이고, 뇌는 그것을 평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MIT의 신경과학자 도네가와 스스무는 2013년 쥐의 뇌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공포 기억을 인위적으로 심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을 처리하는 뇌의 방식은 완전히 동일했다. 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않는다.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구분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곳까지 뻗어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빛의 파장을 번역하고, 공기의 진동을 소리로 만들고, 피부의 자극을 감각으로 변환하는 바로 그 뇌가, 지금 이 순간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꿈과 현실의 차이는 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뇌가 두 가지 다른 포맷으로 편집한 두 편의 영화일 뿐이다.감독은 동일하다. 촬영 현장만 다를 뿐. [생각이 굳으면 감정이 된다]한때 '차은우'라는 이름은 잘생긴 남자의 형용사로 쓰였다. 그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 이상형의 기준점이 됐고, 여성들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일종의 공인된 미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세금 관련 의혹이 터졌다. 사실관계의 무게를 떠나, 여론은 빠르게 뒤집혔다. 이상형을 말할 때 더 이상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광고 계약은 해지됐다. 같은 얼굴인데, 다른 사람이 됐다.무엇이 바뀐 걸까?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생각이 바뀌자 감정이 따라 바뀌었다. 사람들은 생각과 감정을 별개의 것으로 분류한다. 이성과 감성, 머리와 가슴이라는 오래된 이분법. 그러나 이 구분은 실제 작동 방식과 다르다. 생각과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발현의 속도가 다를 뿐, 같은 것이다.생각은 건조하다. 빠르게 형성되고 빠르게 바뀐다. 처음 보는 사람이 거액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생긴다. 그런데 그 돈이 탈세를 위한 위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생각은 다음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뒤집힌다. 생각은 이렇게 가볍다. 감정은 다르다. 감정은 축축하다. 한번 스며들면 쉽게 증발하지 않는다. 자녀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가 눈앞에 있어도, 부모의 감정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 이성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은 '그럴 리 없다'는 자리를 오래 붙들고 있다. 수십 년을 함께한 연인이 배신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이 그것을 따라오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걸린다.감정이 느린 이유는 단순하다. 감정은 생각이 반복되고 누적되어 굳어진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생각은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같은 생각이 반복되면 뇌 안에 회로가 새겨진다. 그 회로가 두꺼워질수록 생각은 점점 자동화되고, 어느 순간 의식적 판단 없이도 특정 방향으로 반응하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감정이다. 생각의 반복이 만들어낸 굳은살. 그렇다면 무의식은 무엇인가?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감정이 굳어진 생각이라면, 무의식은 감정이 더 깊이 침전되어 더 이상 의식의 표면에서 인식되지 않는 상태다. 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보이지 않지만 맛을 결정한다. 우리가 왜 특정 상황에서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왜 반복적으로 같은 선택을 하는지, 왜 비슷한 꿈을 꾸는지. 그 답이 거기 있다.앞서 이야기했던 꿈들을 다시 떠올린다. 살해당하고, 익사하고, 쫓기던 그 밤들. 그 시기는 정신적으로 가장 무너져 있던 때였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감정은 오래도록 어둡고 축축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무의식은 그 감정의 침전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은 그것을 그대로 꺼내 보여줬을 뿐이다. 무의식이 연출한 세계는 내면의 상태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반영했다.꿈이 내면의 거울이라면, 반대 방향도 성립한다.생각을 바꾸면 감정이 바뀌고, 감정이 바뀌면 무의식이 바뀌고, 무의식이 바뀌면 꿈이 바뀐다. 그리고 뇌가 꿈과 현실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꿈이 바뀌는 것과 현실이 바뀌는 것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얇다. [호접지몽: 나비인 내가 장자의 꿈을 꾸는가]기원전 4세기,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어느 날 나비가 된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완전한 나비였다. 꽃 위에 앉고, 하늘을 날고, 바람을 가르는 나비. 장자라는 인간의 기억도, 정체성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비로서의 감각과 나비로서의 세계만이 존재했다.잠에서 깨어난 뒤 그는 혼란에 빠졌다."지금 내가 나비 꿈을 꾸던 장자인가, 아니면 장자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가?"이 질문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답이 없다. 그리고 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다. 꿈속의 나비와 현실의 장자를 구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두 세계 모두 그 안에 있을 때는 완전한 현실이었다는 것.장자의 혼란은 철학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뇌의 실제 작동 방식에서 비롯된 필연적 귀결이었다.꿈속에서 뇌는 시각 피질을 활성화해 장면을 만들어내고, 편도체를 자극해 공포와 쾌락을 생성하며, 운동 피질에 신호를 보내 몸이 실제로 반응하게 만든다. 수면 중에는 근육을 마비시키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에 몸이 실제로 움직이지 않을 뿐, 뇌 안에서 벌어지는 처리 과정은 깨어 있을 때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같은 감독이 같은 방식으로 찍은 두 편의 영화. 상영관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빛이 눈에 들어오고, 소리가 귀에 닿고, 피부가 온도를 감지한다. 그 신호들이 뇌로 전달되고, 뇌는 그것을 편집해 하나의 세계로 구성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경험하는 현실은 외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신호를 뇌가 번역하고 조립한 결과물이다. 뇌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경험하는 그것은 뇌가 만들어낸 버전이다.물리학자들은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전자기파와 입자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색깔도 형태도 소리도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측정 장치, 즉 뇌를 통과할 때 비로소 특정한 형태로 나타난다. 양자역학이 관측 행위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때, 그 관측의 주체는 결국 의식이다. 세계는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꿈과 현실의 차이를 지금까지 우리는 이렇게 규정해왔다. 꿈은 가짜고 현실은 진짜라고. 꿈은 뇌가 만든 환상이고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그러나 이 구분은 뇌 바깥에서 두 세계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 존재한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런 시점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뇌 안에서만 세계를 경험한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장자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현실 역시 뇌가 구성한 세계였다. 나비였던 그가 장자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뇌가 다른 포맷의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하나 남는다.꿈속에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폭발하는 건물에서 탈출했고, 살인자 앞에서도 버텼으며, 외계 생명체의 시선 아래서도 숨을 참으며 살아남으려 했다. 뇌가 만들어낸 그 세계 안에서 당신은 한계 없이 움직였다.그런데 지금, 뇌가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 안에서 당신은 왜 움추려드는가? [꿈 속에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았는데]꿈 속에서는 꽤 담대했다.수영장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쳤다. 건물이 폭발하는 순간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피했다. 살인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그 공포 속에서도, 숨을 죽이며 버텼다. 외계 생명체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그 자리를 지켰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내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면접 결과가 두렵다는 이유로 지원서를 미룬다. 거절당할 것 같다는 이유로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실패할 것 같다는 이유로 시작을 늦춘다.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 같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꿈속의 살인자 앞에서는 숨을 참으며 버텼던 사람이, 현실의 타인의 시선 앞에서는 스스로 무릎을 꿇는다.이 역설은 단순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꿈속에서 당신이 대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세계를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허우적댈 때,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발버둥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깨어나면 끝날 것을 알았다면, 공포도 절박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 세계가 전부였기 때문에 전력을 다했다.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온전히 그 안에 있었다.현실에서 당신이 움추려드는 이유도 정확히 같은 구조에서 비롯된다. 다만 방향이 반대일 뿐이다. 이 세계를 너무 진지하게 믿기 때문에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무게를 실패, 거절, 망신, 좌절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하게 고정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꿈속의 죽음은 깨어나면 사라졌다. 그런데 현실의 실패는 영원히 남는다고 믿는다. 꿈속의 공포는 끝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의 두려움은 끝이 없다고 믿는다.그 믿음은 과연 진짜인가? 10년 전 당신을 가장 두렵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라. 그것이 지금도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가? 5년 전 반드시 망할 것이라 확신했던 일들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때 느꼈던 절망의 밀도와 지금의 현실 사이의 간격을 직시해보라. 두려움이 예언한 미래와 실제로 도착한 미래는 대부분 달랐다. 두려움은 언제나 최악을 상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최악은 생각보다 훨씬 드물게 찾아온다.뇌과학자들은 인간이 미래를 상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과거의 기억을 재생할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은 과거의 파편들을 조합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기억들을 재료로 가장 두려운 버전의 미래를 뇌가 자동으로 편집해낸다. 두려움의 실체는 미래가 아니다. 과거가 덧씌워진 현재다.그렇다면 지금 당신을 멈추게 하는 그 두려움은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반응인가, 아니면 뇌가 과거의 데이터로 조립해낸 또 하나의 꿈인가? 꿈속에서 당신은 몰랐다. 그것이 뇌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그래서 전력을 다했다. 지금 당신은 안다. 이 세계 역시 뇌가 구성한 세계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세계에서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뇌가 과거로부터 편집해낸 허구라는 사실을.아는데도 움추려든다면,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꿈을 반복해서 믿어왔느냐의 문제다. [이번 꿈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은가]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글을 적는다.나는 매월 XXX원 이상의 순수익을 벌고 있다.나는 XXXXXXX XXX를 타고 XXXX를 즐기는 중이다.나는 XXXXXXXXXX XXXX를 타고 XXX를 누비는 중이다.나는 전세계에 X XXX X XXX XXX개를 보유하고 있다.나는 XXXXX XXXXX XXXX XXXXXX XXXX.아직 현실이 아닌 것들이다. 통장 잔고는 그 숫자와 다르고, 지금 타고 있는 건 그 탈것이 아니며, 다른 것들도 아직 그 상태가 아니다. 그런데도 현재형으로 적는다.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문장으로.이상한 짓처럼 보일 수 있다.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들을 다시 떠올린다. 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않는다. 가짜 기억을 심어도 진짜 기억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생각이 반복되면 감정이 되고, 감정이 침전되면 무의식이 된다. 무의식이 바뀌면 꿈이 바뀌고 뇌가 꿈과 현실을 동일한 포맷으로 처리한다면, 꿈이 바뀌는 것과 현실이 바뀌는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믿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다.현재형으로 적는 행위는 거짓말이 아니다. 뇌에게 보내는 반복 신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이 원리를 반대 방향으로 평생 써왔다. '어차피 안 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그걸 할 수 있을 리 없다', '해봤자 또 실패할 것이다' 이 문장들도 현재형이다. 그리고 이 문장들도 반복될수록 감정이 되고, 무의식이 되고, 결국 현실이 된다. 우리는 이미 이 메커니즘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완벽하게 작동시켜왔다. 방향만 바꾸면 된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현재형으로 적는다고 해서 현실이 다음 날 바뀌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뇌는 반복된 신호를 받아 무의식의 기준값을 서서히 조정하고, 그 기준값이 바뀌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면 선택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이 연쇄는 빠르지 않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곳에 도달한다. 꿈이 그랬던 것처럼. 힘들었던 시기에 꾼 꿈들은 어두웠다. 살해당하고, 익사하고, 쫓겼다. 그것은 당시 내면의 상태가 무의식에 침전된 결과였다. 반대로 말하면 내면의 상태가 바뀌면 꿈도 바뀐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랬다. 생각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을 때, 꿈의 질감도 달라졌다. 극적인 전환이 아니었다. 물이 서서히 다른 온도로 바뀌듯, 알아차리기 어려운 속도로.장자는 나비 꿈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워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질문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일 수 있다.이 현실이라는 꿈 안에서, 우리는 매일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다. 무의식이 알아서 틀어주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관람하거나 아니면 상영될 영화의 내용을 조금씩, 의식적으로 편집하거나. 서막의 그 밤들을 다시 떠올린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었고, 칼이 꽂히는 순간 ‘이게 죽음이구나’라는 고통을 경험했으며, 누군가와 뒤엉킨 열기 속에서 몸은 서로의 그것을 탐하고 있었다. 뇌는 그 모든 것을 진짜로 처리했다. 꿈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뇌에게는 처음부터 그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다. 이 세계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는 것과 그것대로 사는 것 사이의 거리가, 사람마다 인생의 밀도를 결정한다는 것을. 장자는 꿈에서 깨어난 뒤 물었다. "나비였던 내가 지금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가, 아니면 장자인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그 질문은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열려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답이다. 어느 쪽이든 꿈은 계속된다. 문제는 진짜와 가짜가 아니라, 그 꿈 안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다.'꿈속에서 담대했던 것처럼, 이 꿈에서도' 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이번 꿈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은가? ..... Ólafur Arnalds - < Near Light >( 'Soeng' = '아주 가까이' (독일어) ) © 2026 Thinkerity. All rights reserved. 아직 Thinkerity를 구독하지 않으셨나요?📅 매주 화·목 오전 7시 / 토 오전 10시 (KST) 발송